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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르노의 비도덕적인 경영이 문제가 있지는 않았을까? 열
악한 작업 환경을 개선해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지속됨에도 경영진
들은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매해 노동자들의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38)
결국 노동자들은 1936년 공장을 점거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25,000여 명
의 노동자들이 비양쿠르 공장을 점거했고 파업의 상황은 심각해졌다. 수백
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요했다.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의 산정
방식 개선, 위생 및 안전설비 확보 등 통상적인 요구 사항들을 제시한 이
파업은 프랑스 사용자 단체인 프랑스생산총연맹(CGPF)과 노동총동맹의 대
표자들이 6월 7일 바렌 가(Rue de Varenne)에서 만나 마티뇽 협정
(Accords de Matignon)39)을 맺으면서 끝이 났다. 오늘날 마티뇽 협정은
노동총연맹의 영향력을 크게 신장시킨 노동자 계급의 보기 드문 승리라고평가받는다.
그러나 르노 사에서 노동자들의 처우는 개선되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르노 사가 주 40시간제의 적용으로 야기된 인건비의 부담을 줄이
기 위해 선택한 것은 새로운 기계의 설치였다.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게
되자, 노동자들은 해고나 노동시간의 단축을 두려워하며 새로운 기계의 설
치를 반대하는 탄원서를 회사에 제출하기도 했다. 주 40시간의 법 제정은
루이 르노로 하여금 그의 공장을 더 근대화하고 생산을 다시 조직하도록
고취시켰다.40) 르노에게 생산은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기계화를
통한 대형화와 빠른 속도에 대한 르노의 신뢰, 생산 조직화에 대한 그의
노력에서 이제 우리는 테크노크라트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 전환기 프랑스에서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는 조건
들이 갖추어져 있었는가?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훌륭한 도로체계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파리의 도로는 루이 14세가 집권하던 17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제1의 강국으로 외국으로부터의 침
략의 우려가 없었고 따라서 루이 14세는 파리 교회에 있던 중세 이래의 성
벽을 헐고 그 자리에 넓은 도로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후에는 나폴레옹
3세의 파리 재정비사업으로 160km의 파리 시도(市道)가 만들어졌다.
30-40m의 폭을 가진 이 직선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주위의 건물은 과감히
제거되었고 도로가 완성된 후에는 높이와 모양이 통일된 건물들이 새로 건설되었다.
이렇게 잘 정비된 도로체계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세계 처음으로 자동차 경주가 시작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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